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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공지사항입니다.

청년이라는 문제의 불가능성 (비정규직 20대 청년의 문제 시리즈 1)
제목 청년이라는 문제의 불가능성 (비정규직 20대 청년의 문제 시리즈 1)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
  • 작성일 2012-12-12 16:41:46
  • 추천 추천 하기
  • 조회수 321
  • 평점 0점

오늘 <웹진 문화 다>에서는 청년취업문제에 대한 비판을 다루는 글이 올라왔네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리라 생각이 되는 글입니다.


   몇 해 전부터 청년이라는 이름이 화두로 등장했다. 소위 ‘88만원 세대’라는 명칭과 함께, 그리고 총선을 거쳐 대선을 맞은 지금까지 끊임없이 청년이라는 것은 복합적인 문제를 표상하는 하나의 대리물로 등장해왔다.

   사실 청년이라는 것은 항상 시대의 화두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청년이라는 화두와 그 이전에 쓰이던 청년이라는 말에는 어떤 차이들이 있는 것 같다. 예컨대 70년대 청년은 장발에 통기타 같은 걸로, 80년대는 대학생 운동권으로, 그리고 90년대가 되면 그들은 신세대 X세대 같은 것으로 시작되는 온갖 세대론의 주연으로 표상되었다. 각기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에는 문화적 풍성함이나 소비문화 같은 것들 혹은 저항과 혁명의 주체라는 역할이나 이미지가 있었다. 그것들은 어쨌든 풍성함이나 진취성과 같은 것들로 상징화 됐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이야기 하는 청년에 그런 포지티브한 느낌은 없다. 오히려 우울이나 불안, 초조, 실패, 실업같은 네거티브한 느낌이 훨씬 강하다. 


                                                           3포 세대

   청년으로 살아가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지금의 청년 세대를 '3포세대'라고 부른다. 취업, 결혼, 출산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 즉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한 후,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삶의 경로 자체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전에 그들에게 제시되는 질문이 ‘언제’와 ‘어떻게’(언제 결혼할래? 아이는 언제 낳을거야?)였다면, 이제 그 질문은 그것의 가능성을 따지는 것(결혼은 할 수 있겠니? 아이를 낳아서 제대로 기를 수 있겠어?)으로 바뀌었다.

   청년의 삶이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을 따져야 하는 극한의 조건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청년을 해결해야할 문제의 대상으로 만드는 가장 전형적인 방식일 것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청년이 문제 해결의 주체에서 그 자체가 해결해야할 문제가 되어버렸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진단에 쉽게 휩쓸리기 전에, 그 진단 자체를 문제시 해야 한다.

   우선, 제기해야할 문제는 청년이라는 표상의 불가능성 혹은 규정의 불가능성이다. 청년이라는 것이 규정될 수 없다면, 질문해야 할 것은 청년이라는 문제의 대상이 등장하게 되는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청년을 정형화된 생애 주기의 한 단계로 환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청년이란 아이와 어른의 중간 단계로써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가 아이나 아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근대에 와서 발견된 것이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은,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아동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나이를 기억하고, 생년월일을 정확히 아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주민등록증을 만들어야 하고, 학교에서 단계를 구분하거나 시험을 볼 때 등 일정한 수속이 필요한 곳에서 서류 양식에 그것들을 사용해야 한다. 취직을 할 때도, 호텔 숙박부를 적을 때도 그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전에 나이를 세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출생의 좌표라는 것은 엄밀한 수량화와 관리의 체계가 만들어지기 전에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인간의 연령은 단지 몸에 대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부 학자들만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었다. 유아 사망률이 극도로 높은 사회에서 아이에 대한 감정적 고착도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애정 교환은 가족이라는 사적 공간이 아니라 이웃이나 친구, 주인과 시종, 남자와 여자 관계에 투여되는 것이었다. 아동이나 아이는 일종의 감정 혁명과 교육혁명이라는 것을 경유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

   아동이나 아이라는 것이 인식 가능한 대상으로 등장하고 나서야 아이와 어른의 구분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런 구분과 분할을 통해서만 청년이라는 것이 등장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아이와 어른이 구분되고 난 이후에야,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서 성숙이나 발달이라는 것이 하나의 과정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생애 주기의 일부로 편입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청년이란 오직 과정으로서만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사회적 기업의 사업 주체로, 또는 온갖 NGO단체들의 운동 대상으로, 그리고 정부에서 제출되는 실업통계같은 것으로 표상되고 있다. 만약 청년이라는 것이 실정적인 방식으로 규정 불가능한 것이라면, 그것이 성숙, 성장, 발달, 발전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런 방식의 표상을 통해 문제화 되는 것은 청년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다른 문제들을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대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청년유니온과 청년연대은행
   
   현재 한국에서 청년 문제를 다루는 것을 자신의 주된 활동으로 삼는 대표적인 두 개의 운동을 들자면 청년유니온과 청년연대은행일 것이다. 청년유니온은 소위 아르바이트로 연명해야 하는 청년들의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운동이고, 청년연대은행은 금융적 상호부조를 통해 생활비를 지원 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만들기 위한 운동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 학자금, 최저임금, 기초생활비라는 문제를 이 시대의 청년들이 처한 핵심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결코 청년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청년유니온에서 말하는 아르바이트의 경제라는 것은 청년들만의 문제라기보다는, “평생 직장은 없고, 평생 직업의 시대다”, “교육의 사회는 끝났고, 평생 학습의 사회다”, “근력의 시대는 끝났고, 이제 지력의 시대이다”, “인사노무관리의 시대는 끝났고, 이제는 인적 자원의 시대다” 등등의 구호들로 대변되는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일의 정체성의 변형과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평생 직장도 없고, 끊임없이 자신을 교육시키고 커리어를 관리하는 인적 자원으로 만들어야 하는 시대다. 자기계발이란 바로 이런 시대의 노동 정체성이 구성되는 원리일 것이다. 그리고 청년이라는 것이 성장과 발전의 과정을 가리킨다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런 노동 정체성의 구성 과정을 가리키는 것일 게다. 따라서 청년 문제라고 부를 때 그것은 특정한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일과 노동의 정체성이 변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가리키는 일종의 대리 표상이 되는 것이다.

   청년연대은행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금융경제 시스템 안에서 파탄난 삶을 회복할 수 없는 청년들을 구제하기 위해 연대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적 실패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회 불안 요소를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안전장치를 복지라고 했을 때, 그 핵심 원리가 바로 연대일 것이다. 그리고 그 연대에 기반한 복지 시스템은 우리가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위기와 함께 사그라 들고 있다. 요컨대 청년연대은행은 사회-복지라고 부르는 것을 가능하게 했던 원리이자 이제는 사멸해 가는 연대라는 것을 통해 사회를 다시 회복시키고자 하는 운동이다.

   특수한 역사적 조건하에서 가능했던 것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임을 말하기 전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청년들의 삶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청년을 하나의 세대로 규정한다 해도, 그것은 연대의 원리가 아닌 분할의 원리가 아니던가. 청년이 하나의 문제로 등장했다는 것은 결국 세대별 연대에 기초한 복지 시스템(노년층에게 돌아갈 연금을 보충하는 청년세대)의 붕괴나 집을 둘러싼 세대별 순환 고리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정말 청년이 문제인가를 물어야 한다. 청년, 혹은 청년 문제라는 것을 통해 표상되는 것은 청년이 아니라 변화된 자본주의의 위기나 ‘사회(the social)’의 위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때문에 청년 문제를 세대론의 문제로 풀려고 하거나, 세대의 문제로 축소시키려고 하는 것만큼 모순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다른 비평글을 보시고 싶으신 분은 아래 <웹진 문화 다>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링크: www.munhw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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