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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 그 분노의 기원을 찾아서: 26년을 위한 편지
제목 32년, 그 분노의 기원을 찾아서: 26년을 위한 편지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
  • 작성일 2012-12-18 10:46:26
  • 추천 추천 하기
  • 조회수 316
  • 평점 0점

 

오늘의 웹진은 안숭범 평론가의 영화 <26년>과 관련된 문화시론입니다. 

 

<문화 시론> 32년, 그 분노의 기원을 찾아서: 26년을 위한 편지

   여전히 ‘광주’라는 지명은 때론 관념어다. 대선열기가 뜨거운 지금도, 누군가는 그 단어를 경유해 이른바 ‘색깔론’에 속하는 이념적 공세를 준비하고, 누군가는 해명하기 벅찬 부채의식을 느낀다. 1980년 광주의 5월을 전혀 다르게 되새기는 태도이지만, 그들 사이에도 공통점이 있다. ‘광주의 봄’을 기억하는 양 극단에서 그들은 여전히 뜨거운 온도를 유지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 양 극단 사이 무정치성(‘비정치성’이 아니다)의 지대에 숨어 살아 온 일부 ‘말하지 않는 자’들에겐, 그 해 광주의 봄이 더 이상 유의미한 영향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중엔 그 해 광주의 봄을 함께 지켜본 이들도 있다. 이처럼 ‘광주의 봄’을 목도했음에도, 그에 대한 관념은 동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합의된 공체험으로 내려앉지 못했다. 5월 18일 광주 금남로 앞에서 근대사의 어두운 배면이 너무 한꺼번에 폭발한 탓에 이제 와서 추인하긴 너무 복잡한 사건이 되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26년>이 도착했을 때, 이미 복잡한 파편으로 갈래화 된 ‘광주’에 관한 관념‘들’이 좀 더 바람직한 의미로 수렴되길 기대했다. 그러나 영화는 대선이 시작됨과 동시에 구축된 진영 논리의 희생양이 되어가는 형국이다. 최초 기획의도와 영화의 서사적 흐름을 보건대, 의지가 선명하고, 투지가 살아있는 것은 틀림없다. <26년>을 통해 피 묻은 한국 근대사에 대한 자의식을 새롭게 갱신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주인공들이 베푼 정서적 여운으로부터 무뎌진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을 가다듬은 사람도 있을 줄 믿는다. 그렇지만, 거기까지였다. 영화는 ‘그 사람’을 향한 분노를 묘사하는 것만으로 2시간 넘게 내달리지만, 분노의 내막을 균형있게 공론화시키는 데에는 다소 실패했다(이에 대해서는 지승학이 쓴 본 웹진의 “비정규‘적’ 20-30대의 ‘실패한’ 분노”를 참고하라). 아무래도 <26년>은 좀 더 잘 만들어져야 하는 여러 이유가 있는 영화였다. 

   한국 근대사에서 ‘광주’가 갖는 관념을 완전히 구체화한다는 건, 그리고 그 작업을 한 개인이 해낸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26년>이 남긴 아쉬움의 힘으로, 지금부터 영화가 좀 더 진지하게 포용했으면 좋을 그해 봄 광주의 분노를 좀 더 소상하게 적어보고자 한다. 미리 밝히면, 이 글은 영화읽기로부터 더 멀어질 것이다. <26년>이 다 묘사하지 못한 광주에 스민 분노의 깊이를 불완전하게나마 헤아려 보려는 시도다. 일부 내용은 아버지의 증언에 빚졌다는 것을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의 증언과 나의 기억에 대한 해석은 각자의 몫으로 맡긴다. 

   나는 광주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광주광역시 북구 삼각동엔 향토사단인 31사단이 위치해 있다. 정문에서 도보로 불과 2-3분 거리엔 이제 사라졌지만,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집이 위치해 있었다. 당시엔 가까이 둘러보면 논밭이었고, 멀리 내다보면 낮은 구릉성 산지들이 띄엄띄엄 마을을 품고 있는 아담한 촌구석이었다. 당시 나의 고향집은 벽돌을 쌓아 만든 키 낮은 담장이 삼면을 막아주었고, 한 면은 촘촘하게 엮인 탱자나무들에 의해 자연담장을 이루고 있었다. 1980년 5월 중순. 집 주변으로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고 한다. 평소에도 군인을 자주 볼 수 있는 동네였지만, 그 날은 군인들의 복장과 무장 상태에서 전혀 낯선 기운이 느껴졌다고 한다. 급기야 탱자나무 너머에 기관총 진지가 구축되었다. 어머니는 탱자나무 담장 이편에서 평소처럼 빨래를 하는데, 건너편에선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기관총으로 도로를 겨냥하고 있었던 셈이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정치적인 색깔이라곤 전혀 없는 젊은 어머니는 목말라하는 군인들에게 물을 주기도 하고, 굶주린 그들이 친동생 같아서 종종 밑반찬도 건넸다고 한다. 그러나 출퇴근 때마다 자전거로 금남로와 전남대학교를 지나칠 수밖에 없던 아버지는 상황의 심각성을 이내 간파하셨다. 그때부터, 집 안 모든 벽면에 두꺼운 솜이불이 둘러쳐졌다. 총탄이 튈 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아버지의 고육지책이었다. 등화관제 사이렌 없이도, 우리집은 일찍 잠들었다. 숨죽여 누운 저녁에 멀리서 총소리가 들리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분 사이에서 곤히 자는 남매를 서로 꽉 안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금남로의 충격을 직접 목격하셨다. 시민군이 계엄군에 최소한으로 대응하기 위해 무기고의 총을 탈취해 나눠가질 때, 아버지에게도 총이 건네졌다 한다. 강조할 필요가 없는데도 강조해야 한다는 사실이 좀 슬픈데, 굳이 밝히면 아버지와 당시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소위 ‘빨갱이’가 아니다. 최근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총이 건네졌다. 그러니까, 당시의 아버지는 자원하는 즉시 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린 누나와 내가 끝내 눈에 밟혔다고 한다. 아버지의 증언에 따르면, 도청 앞에서 시위대를 향해 주먹밥을 나르고, 물을 건넸던 사람들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그 언저리에서 노점을 하던 사람들, 가게를 하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이웃들이었다고 했다. 그들은 어제까지 자기를 향해 인사하던 이웃집 막내아들이 죽는 것을 봤고, 건넛집 아주머니 남편이 죽었단 소식을 건네 들은, 그저 상식적으로 분노한 사람들이었다. 

   그로부터 7-8년 지났을까.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서 13대 국회의원 후보자들의 합동 유세가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그곳에 가셨다. 단상에 한 노신사가 올랐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운동장을 가득 메운 그 많은 시민들이 거의 집에 돌아갔다. 다른 후보자들은 아직 연설도 못해본 상황이었다. 그 노신사의 이름은 정웅이다. 아버지의 기억을 빌리자면, 그는 연단에서 “내가 1980년 5월 사건으로 군복을 벗은, 당시 31사단장 정웅이올시다.”라고 말했고, 사람들은 힘을 다해 환호했다고 했다. 정웅에 관한 역사적 시선은 다소 엇갈리지만, 당시까지 광주 시민들에게 정웅은 영웅으로 기억됐다. 1980년 시민들을 향해 총을 발포하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고 스스로 군을 떠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해 정웅은 91.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 득표율은 오랜 시간 깨지지 않은 기록이 되었고, 그 자체로 지금도 많은 말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로부터 몇 해가 더 지나, 나는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로 진학했다. 전남대 교수아파트가 있던 고갯마루 부근으로 이사해 살던 나는, 전남대학교 안을 가로질러 대학 정문 쪽에 있는 학교로 등교했다. 그 때문에 ‘5.18 광장’이라 불리던 도서관 옆 공터를 매일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5월이면 코를 찌르던 그 언저리의 최루탄 냄새를 나는 여전히 잊지 못한다. 그리고 ‘5.18 광장’에 길게 전시되던 끔찍한 사진들(대게는 광주민주화운동 때 숨진 사람들의 현장 사진이었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등교 때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는 오른편을 보지 않고 걸었고, 하교 때는 다시 왼편을 보지 않고 걸었다. 사진들을 보면, 집에 와서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가끔 어쩔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려 사진을 보게 되면, 그 장면을 평생 떠올리며 살고 있을 숨진 자들의 가족이 헤아려졌다. 어쩌면, 나도 그런 고통에 내몰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사진들을 본 기억만으로도 가끔 숨을 쉬기 불편하다. 

   나는 ‘광주의 봄’을 불순한 폭동으로 거론하며 이념적 공세를 취해 본 적도 없지만, 그 기억으로 인해 강한 부채의식에 시달린 사람도 아니다. 한마디로, 정치적 양극단에서 ‘광주의 봄’을 뜨겁게 변론하며 살아 온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광주의 봄’에 대한 생체험 없이 당시 5공화국의 여론 조작 내용을 그대로 재생하는 사람들에게서 아픔을 넘어선 정신적 통증을 느낀다. 

   각설하고, 이것만은 분명히 하자. 사과와 용서는 우선적으로 당사자 원칙이다. 사건에 ‘피해/가해’의 형태로 연루된 자에 한해서, 진정한 윤리적 구원을 바랄 수 있고, 그 요청에 응할 권한도 주어진다(이창동의 <밀양>과 이정향의 <오늘>을 상기하라).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26년>을 아쉬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영화를 본 관객들의 실천을 통해 그 당사자들을 움직일만한 일말의 가능성을 영화가 보여주지 못한 데 있다. 선거철만 되면 ‘광주’에 얹힌 관념들이 더 복잡해진다. 바라건대,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가 설령 다르더라도, 그 해 봄 광주에서 죽은 희생자들을 재차 죽이는 폭력엔 가담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그 충격적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그 사람’이, 죽기 전에 정신적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찾길 간절히 기도한다.


다른 평론들을 보시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 <웹진 문화 다>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링크: www.munhw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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