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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웹진] 기술에서 몸으로의 꺼림칙한 부활
제목 [오늘의 웹진] 기술에서 몸으로의 꺼림칙한 부활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
  • 작성일 2012-12-04 09:41:07
  • 추천 추천 하기
  • 조회수 376
  • 평점 0점

 

 

<영화 읽기> 기술에서 몸으로의 꺼림칙한 부활  - 지승학 영화평론가
 
<007 sky fall>2012

 

 

intro.

 

   나이가 나이이니 만큼, 그가 여전히 정력적이기 에는 무리가 따른다. 시대의 "Brand New"를 외치던 그도 이젠 고전을 논하려 한다. 이제 더 이상 자동차가 탱크의 위력을 갖고 있지도 않고, 손바닥만 한 무언가가 미션의 신화적인 성공을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구식의 면도날, 올드한 자동차, 지문인식 권총 그리고 사냥용 장총과 과거에도 보지 못했던 다이너마이트 한 다발이 그가 가진 기술력의 전부이다. 그 뿐인가. 그는 사뭇 진지하다 못해 자기를 성찰하고, 전지전능하던 기술력에 심취했던 오만을 조롱당한다. 영화적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주던 기술력을 내려놓고, 그 답지 않게 몰래 빼돌린 구닥다리 차(?)에 의지하는 한편 늙은 노인네들의 충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물론 할머니의 말은 여전히 어머니의 잔소리로 들리지만 그래도 영화 스토리의 결정적 역할을 맡기는 전관예우를 잊지는 않는다. 이젠 더 이상 그는 날개 단 듯 허공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지 못한다. 그의 이러한 이상 징후를 영화는 부제로 ‘SkyFall'이라 명명한다.

 


고난의 시작

 

   007시리즈는 점점 그 유명한 주제곡에 온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내어 맡긴다. 이 현상이 한편으론 안일해 보이고 한편으론 측은해 보이기까지 한다. 전자는 역사적 맥락을 노골적으로 등에 없고 거들먹거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고, 후자는 더 이상 이 시리즈에 대한 정체성을 주제곡을 빼놓고 보면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이 포착된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등장이후부터 부각되기 시작한 몸짱 제임스 본드의 모습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007 Skyfall>에서 일당백의 제임스 본드는 이젠 체력테스트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부적절한 몸 상태를 앞세워 우리 앞에 아니, 'M'앞에 나타난다. 한 번도 그래 본 적 없는 ‘임무실패’라는 치욕의 결과도 미심쩍지만 변함없는 몸짱 치고는 나약해 빠진 게 뭔가 더 미심쩍다. 물론 이는 그가 임무를 수행하면서 겪게 될 육체적 고통을 위한 중요한 복선이 되기는 한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임무실패'가 나약함으로 환원되는 과정은 분명 뭔가 어설프다. 그런데도 이를 속여 가며 'M'은 그를 미션 수행에 끌어들인다. 이러한 틀 속에서 제임스 본드의 몸은 영국의 전형적인 신사의 품격을 붕괴시키고, 양식적 의상안에서의 이상화된 신체 규격을 거부한 채 반라로 노출된다. 

 


몸과 기술

 

   설 자릴 잃어야 발생하는 ‘추락’은 제임스 본드의 육체를 통해 그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제일 먼저 눈여겨 봐야할 것은 바로 몸의 고통과 기술발명 사이에서 발생하는 시소 현상이다. 제임스 본드의 몸에 고난과 상처가 쌓일수록 장치 기술의 발전은 더욱 더 더뎌진다. 더군다나 장치 기술을 대표하는 'Q'의 천재적 발명 기질은 이제 더 이상 기발한 장치 발명에 있지 않고 오히려 해킹 기술 속에 종속돼 버린다. 실제로 해커로 돌변한 ‘Q'는 아바타를 조종하듯 제임스 본드의 육체를 조종하게 된다. 어디 그뿐인가. 007에서의 거부할 수 없는 본드 걸의 위상도 사무직으로 좌천되거나, 아무런 저항 없이 손발이 묶인 채 잔인한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들이 행하지 못하게 된 모든 육체적 역동성은 모두 제임스 본드의 몸으로 수렴되어 버린 것이다. 오죽하면 사건의 실마리가 되는 금속 조각조차 그의 몸 안에서 발견되게 연출했겠느냔 말이다. 바로 기술에서 몸으로의 관심 전환. 그것은 007 시리즈의 변화 속에서 또 다른 단면을 이루어 현재의 007 위상을 재구축하려는 노력으로 비춰진다.

 


제임스 본드의 메시아적 부활?

 

   그러나 이러한 의도의 본의는 무엇인가? 엄밀히 말해, 그러한 ‘몸 고생 미션 수행기’는 ‘제이슨 본’과 ‘에단 헌트’, 원조 생 고생 캐릭터 ‘존 맥클레인’에게 이미 있어 오지 않았는가? 단순히 제임스 본드의 고생기를 위해서였다면 평가는 박해질 수밖에 없다. 뭔가 다른 차이란 게 있겠지. 바로 그게 무엇일까?

 

   그것은 나머지들 캐릭터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반세기 동안 이어져온 유구한(?) 역사에 의한 특유의 훈향에서부터 시작되는 모든 것이다. 이는 다른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007 시리즈만의 특징이다. 그래서 전통이라는 단어를 들먹거리는 제임스 본드의 냉소적인 언변은 사실상, 그 말을 당당히 발언할 수 있는 역사적 맥락 때문이며, 의미 해석의 확대를 가능케 하는 아우라의 숭배적 가치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특권이다. 그런데 <007 Skyfall>은 바로 그 지점, 즉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누적돼온 전통성에 대한 특권 그 자체에 서서히, 그리고 스스로 의문을 품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스스로 품은 의문을 내부로 향하게 하고 이를 몸소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려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 속 갈등이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적, 다시 말해 MI6 조직의 정보요원 소속이었던 실바라는 캐릭터로부터 유발된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충분히 유추 가능한 것이다. <007 스카이 폴>이 펼쳐 보이는, 어디선가 본 듯한 ‘유사한 몸 고생 서사’는 그래서 지난 역사와 전통 속에서 안일함으로 잠식되어 왔던 캐릭터를 쇄신하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부활의 실체

 

   그러나 007은 연륜 있는 현자들의 출현을 여전히 즐긴다. 그들은 일종의 ‘전통’을 의인화한 캐릭터다. 애스턴마틴 DB5도 그 중 하나다. 특히 ‘M'은 엄격한 어머니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것은 정신분석을 운운하기위한 밑밥이 아니다. 그저 과거로부터 깨달음을 얻으려는, 고전 속에 진리가 담겨있다는 논리로 접근하기위한 전제조건이라 보아도 무방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007의 꼼수는 드러난다. 전통을 극복하고자 했으나 너무도 중요한 그 역사성, 그 오욕의 세월을 넘어서는 가치란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의 강조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역할을 떠안은 현자로부터 시작되는 MI6의 제임스 본드와 악당(?) 실바가 아무리 ’아버지가 다른 아들들‘ 간 벌이는 이전투구로 비춰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찰이 아닌 “007의 역사는 위대하다.”라는 전통성의 강조를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자기성찰을 빙자한 자기 변론. 이는 단맛을 본 야생동물이 결국 총살을 당하듯, 자본의 단맛에 길들여진 헐리우드 특유의 상업화 논리에서 007역시 결국 헤어 나오지 못함을 의미한다. <007 Skyfall>의 오프닝 씬, 물 속으로 가라앉는 바로 그의 모습은 헐리우드의 상업화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제임스 본드의 모습을 자기 무덤 파는 줄도 모르고 은유한 것이리라.

 


부활과 반복증식

 

   현실성의 부여를 위해서든, 살아있는 액션의 역동성을 위해서든 아니면 여성 관객의 팬서비스를 위해서든 <007 Skyfall>은 기술 장치에 의존한 미션 수행에서 맨몸 하나에만 의존해야 하는 신체에로의 극적인 변화를 다니엘 크레이그의 몸을 빌려 그렇게 표현한다. 취미가 뭐냐는 실바의 질문에 제임스 본드가 내뱉은 ‘부활’이란 대답은 그런 취지에서 007이 지닌 합목적성을 뜻한다. ‘부활(Resurrection)’이라는 의미는 인간의 몸을 빌려 현현한 메시아의 존재 가치, 즉 육체적 죽음을 극복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지 않은가? 몸을 통한 007의 부활. 그것은 다분히 메사아적 표현의 차용이 맞다.

 


finale.

 

   그러나 이러한 부활이 사라짐과 나타남의 단순 반복의 관계로만 정의 되어 버린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허무한 과거의 재탕으로 26번 우려낸 비생산적적인 반복이라면 상업적 프로세스의 경우 늘 자본만을 노리는 욕망기계로 변질되다가 결국 실패를 재촉할 수도 있다. 그러다가 망한 시리즈들이 어디 한 둘인가. 그래서 007의 부활이 무한 반복과 허무한 증식만으로 거듭되다보면 자본에 오염된 값싼 부활로 치부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제임스 본드의 ‘부활’은 ‘의심하는 도마’의 마음처럼 미심쩍다. 그런데 제임스 본드의 그런 부활을 보고 찜찜해 하던 마음은 뜬금없이 한국 영화의 꺼림칙한 부활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1000만 관중 시대를 맞이한 한국 영화의 부활. 사실 그 이면에는 말만 살짝 바뀔 뿐, 상영 횟수의 무한 반복과 상영관의 무한 증식으로 인한 속물적 부활의 속성이 뻔뻔하게 놓여있지 않은가. 그것은 아무리 추락해도 살아 돌아올 것이 뻔한 제임스 본드의 6번째 배우 부활, 26번째의 시리즈 증식을 주도한 헐리우드의 논리보다 더 황당한 부활일뿐이며 오히려 그들보다 더 지독한 욕망이 투영된 저급한 욕정일 뿐이다. 그래서 <007 Skyfall>에서 제임스 본드의 부활한 몸에게서 얻을 수 있는 공감어린 이미지란, (그의 미심쩍은 반복과 증식에 의한 부활을 통해서), 세상에서 제일이 되고 싶어 별 세 개 달고 설탕을 팔던 개념 없는 문화권력 집단들의 횡포를 간접적으로 지시해주고 슬그머니 007로 복귀하는 그의 지친 뒷모습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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