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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시력자를 위한 "큰글한국문학선집 025"
이인직 소설선 <혈의 누・은세계>
최초의 신소설 작가 이인직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인직은 최초의 신소설 작가로서 구소설과 근대소설로 이어지는, 소설의 전통적 연결을 시도하고 확립한 주요 작가이다. 계몽주의 사상을 기저에 깔고 있으면서 제국주의적 국가관을 암암리에 담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는 많지만, 문장에서 입말체와 묘사체 시도의 효시를 보이며, 객관묘사와 심리묘사의 뛰어난 기량 등 신소설 최고의 작가로 평가된다. 소설가로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혈의 누』, 『귀의 성』, 『치악산(雉岳山)』, 『모란봉(牡丹峰)』, 『은세계』 등이 있고, 단편소설로 「빈선랑(貧鮮郞)의 일미인(日美人)」이 있다. 한국 초기의 신소설가로서 등장인물의 갈등과 성격 묘사, 그리고 사실적 문장을 구사하는 등 신소설을 남겼다.
이인직(李人稙, 1862~1916)
1862년 조선 말기 경기도 음죽(陰竹, 현 이천)에서 태어났다. 1900년 관비유학생의 신분으로 일본 동경에 유학, 도쿄 정치학교에서 약 3년 동안 수학, 1903년 졸업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제국 육군성 1군사령부 소속의 통역관으로 들어가 한어통역부제일군사령부 (韓語通譯附第一軍司令部)에서 복무하였다. 1906년 2월 일진회가 발행하는 국민신보 주필, 6월에는 만세보 주필 등을 역임하였다. 1907년 7월 대한신문을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다. 1908년 3월 중추원 부찬의(副贊議)를 제수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직하였다. 1908년 국립극장 협률사를 인수하여 서양식 사설극장인 원각사(圓覺社)를 세워 11월 <은세계>를 상연하는 등 신극운동을 벌인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추도식에서 추도문을 낭독하였고, 10월에는 친일 유교단체인 공자교회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10년 8월 4일 일본어를 하지 못했던 이완용 대신 일본에 가서 통감부 외사국장이던 고마츠 미도리(小松綠)를 만나 한일합병을 교섭하기도 했다(이인직이 다리를 놓아 8월 16일 이완용과 조중응(趙重應)이 통감 관저를 방문하고, 8월 22일 한일병합 조약을 조인하였다). 경학원의 사성(司成)을 지내면서 한일병합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유포한 『경학원잡지』 편찬을 담당하는 등, 유교 계열의 대표적인 친일 인물로 활동했다. 1910년 국치 이후에는 경학원사성(經學院司成)을 지냈다. 1915년 다이쇼(大正) 일본왕 즉위식에 헌송문(獻頌文)을 지어 조선총독부에 바치는 등 극렬한 친일활동을 했다. 1916년 11월 1일 사망하였는데, 총독부는 병합 당시의 공로에 대한 상여금으로 450엔의 장례비를 교부하였다.
혈의 누 은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