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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순수서정시를 추구
김영랑 시인이 남긴 시들은 일제 치하 암담한 민족의 수난기에 써진 아름다운 언어의 마술이었다. 남도의 유장한 가락으로 순수한 혼의 울림을 읊어낸 시는 그리움과 고독의 정서를 노래하면서도 낭만적 영탄이나 감정 과잉에 빠지지 않고 지성적 세련미를 지녔다. 계급주의 문학의 목적의식이 문학의 독자성을 외면하고 정치적 수단으로 변질시킨 것에 반발하여 시에서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예술적 차원을 심화시켰다.
우아하고 유려한 모국어의 구사로 시의 음악적 미감을 높인 김영랑의 시는 한국 근대문학 시사의 전개에서 독자적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김영랑(1903~1950)
1909년 강진보통학교 입학.
1916년 결혼(1년 만에 사별). 어머니의 도움으로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익힘.
1917년 휘문의숙(현 휘문고등학교)에 입학. 선배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와 후배 정지용, 이태준 등을 만남.
1919년 3.1 운동 당시 선언문을 감추고 강진으로 내려갔다가 발각,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름.
1920년 일본 아오야마학원 중등부에 입학. 박용철을 만남.
1922년 아오야마학원 영문과로 적을 옮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귀국 후 김귀련(金貴蓮)과 두 번째 결혼.
1930년 『시문학』 창간호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후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로 제목이 바뀜) 등 시 30여 편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
1934년 『문학』 창간호에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을 발표.
1935년 박용철의 후원으로 『영랑시집』 간행(시문학사. 김영랑의 첫 번째 시집)
1945년 8.15 해방 후 강진에서 우익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49년 공보처 출판국장을 역임하였다. 한국전쟁 때 서울에서 은거하던 중 수복 하루 전 9월 27일 포탄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어 9월 29일 사망.
김영랑은 일제 말기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는 곧은 절개를 보여주었다.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언덕에 바로 누워/ 뉘 눈결에 쏘이었소
오―매 단풍 들것네/ 함박눈/ 노래/ 쓸쓸한 뫼 앞에/ 꿈밭에 봄 마음/ 님 두시고
아지랑이/ 풀 위에 맺혀지는/ 좁은 길가에/ 밤 사람 그립고야/ 숲 향기
저녁 때 저녁 때/ 무너진 성터/ 산골을 놀이터로/ 그 색시 서럽다
바람에 나부끼는 갈잎/ 뻘은 가슴을 훤히 벗고/ 다정히도 불어오는 바람
떠 날아가는 마음/ 그 밖에 더 아실 이/ 뵈지도 않는 입김/ 사랑은 하늘
미움이란 말/ 눈물 속 빛나는 보람/ 새벽 지친 별/ 설운 소리/ 저 곡조만 사라지면
들꽃/ 언덕에 누워 바다를 보면/ 푸른 향물 흘러버린 언덕 위/ 이 정거장 행여 잊을라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 온몸을 감도는 붉은 핏줄/ 제야(除夜)/ 내 옛날 온 꿈이
그대는 호령도 하실 만하다/ 비는 마음/ 가늘한 내음/ 내 마음을 아실 이
물소리/ 모란이 피기까지는/ 불지암(佛地庵)/ 물 보면 흐르고/ 강선대(降仙臺)/ 달
마당 앞 맑은 새암/ 청명/ 황홀한 달빛/ 두견/ 빛깔 환히/ 내 홋진 노래
수풀 아래 작은 샘/ 연 1/ 언 땅 한길/ 북/ 춘향/ 바다로 가자/ 독(毒)을 차고
강물/ 우감(偶感)/ 묘비명/ 가야금/ 거문고/ 천리를 올라온다/ 오월 한(五月恨)
어느 날 어느 때고/ 지반(池畔) 추억/ 금호강/ 오월 아침/ 오월/ 낮의 소란소리
땅거미/ 집/ 연 2/ 한줌 흙/ 망각